같은 운동팀원들끼리 모여 한손을 들어 화이팅하는 모습

스포츠맨십 3편

스포츠맨십이란?

 

이번 글은 스포츠맨십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며 총 3편중 3편이다. 스포츠맨십은 스포츠가 폭력적 투쟁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내부적 감시기제이며, 스포츠 도덕의 다른 표현이다. 도덕의 근본 문제는 어떤 행위를 선택해야 할지 갈등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정체를 인식하고 합당한 행위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유지해나가는 일과 관련이 있다. 스포츠는 일차적으로 놀이이고, 놀이 중에서도 투쟁적 성격의 놀이, 즉 경쟁이다. 스포츠맨십은 놀이 상황과 경쟁 생황에서 스포츠맨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행위규범이다.

 

경쟁의 도덕: 놀이 자체의 존중

 

스포츠는 놀이라고 했다. 그러나 모든 놀이가 스포츠는 아니다. 스포츠는 특별한 종류의 놀이이다. 그렇다면 그 특별함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스포츠놀이의 특별함은 그것이 투쟁적 성격을 지닌다는데 있다.

스포츠에서는 무엇보다 참가자의 신체적·심리적 능력을 비교하고, 그 우열을 가리는 일이 중요하다. 즉, 스포츠 참가자는 누구나 ‘보다 빠르고, 보다 놓고, 보다 강하기(Citius, Altius, Fortius)’를 원하며, 다른 참가자들보다 우월한 성과를 올리기를 희망한다. 이렇듯 스포츠에서는 이기느냐 지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언제나 치열한 경쟁적 상황이 연출된다. 이런 의미에서 스포츠는 투쟁,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투쟁적 놀이’이다.

스포츠는 그 투쟁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적지않은 비평가들에 의해 야만적인 활동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그러나 스포츠는 결코 문명화 이전의 야만 상태로 되돌아가는 활동이 아니다.  인류사에서 야만적인 공격성과 폭력은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인도주의적으로 봉쇄되어왔다. 엘리아스(Elias)는 이와 같은 역사적 전재를 ‘문명화 과정’으로 표현했다.

주지하다시피 문명화과정은 결코 일회적으로 종결될 수 있는 그런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결코 종결될 수 없는 과정이며, 그런 의미에서 언제나 현재진행형의 속성을 지닌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화과정이 종결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의 야만성이 아무리 억누르고 봉쇄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본성에 속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야만성의 봉쇄를 제도화하고 계발하는 일은 인간의 최우선적인 목표가 된다.

우리는 이와 같은 노력의 결실을 ‘문화’라고 부른다. 우리가 문화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오랜 경험을 통해 그 밑바탕에 도사리고 있는 야만성이 얼마나 처참하고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스포츠는 결코 야만적인 상태로 되돌아가는 활동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야만성을 길들이고 순치시키는 문명화과정의 일환이다. 스포츠는 오래전부터 문화의 울타리 안에서 인간의 야만적 욕망을 분출시키게 해주었던 배출구였으며, 문명적으로 질서 지워진 폭력성과의 교류방식이었다.

생사를 걸고 벌였던 야만적 투쟁은 스포츠화를 통해 규칙에 의해 통제되는 문명적 경쟁 활동으로 변형된다. 스포츠에서는 삶의 폭력적 모순이 인간에 의해 부과된 법칙에 종속되고 그것이 지배를 받게 된다. 우리는 스포츠에서 인간으로서 우리의 자아상과 모순되지 않은 방식으로 상대와 겨룰 수 있으며, 상대에게 실력을 행사할 수 있고, 그를 패배시킬 수도 있다.

스포츠경기에서는 그 투쟁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도덕적 갈등이 야기될 수 있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특히 놀이 참가자가 전문적인 선수일 경우에 승리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들은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 오랫동안 힘든 훈련을 해왔기 때문에 승리에 집착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면 선수들의 감정은 격양되어 폭력적이 되기 쉽고, 규칙 위반의 욕구는 더욱 강렬해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포츠적 경쟁은 도덕적 도전 그 자체가 된다. 심판이 보지 못하는 사이에 규칙을 위반하거나 허용되지 않은 수단을 은밀하게 사용하거나 심판의 판정에 불복하려는 경향이 극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스포츠에서는 강력한 외적 통제뿐만 아니라 내적 통제, 즉 선수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특별한 도덕적 능력이 요구된다.

선수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능력은 외부에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경쟁으로서 스포츠 그 자체의 논리로부터 도출된다. 참된 의미에서 경쟁을 원하는 자, 다른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통해 탁월성을 과시하고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는 스포츠경기에 임함에 있어서 합의된 규칙을 자발적으로 준수해야 한다. 치열한 경쟁과 그로 인해 파생될 수 있는 감정적 격양이 예상되는 극단적 조건하에서도 자발적으로 합의된 규칙을 준수하는 자는 높은 도덕적 자질을 지닌 자이다. 그러나 ‘놀이하는 자’는 규칙을 준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놀이하는 자’는 놀이 자체를 보호하고 놀이로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경쟁이 과열되고 감정적 대립이 심해지면 규칙이 아니라 놀이 자체가 위협받게 되기 때문이다.  ‘놀이하는 자’가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스포츠맨이자 경쟁하는 자로 이해하고 그런 자로 남기를 원한다면 규칙을 준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놀이로서 경쟁’을 지켜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만일 경쟁이 허용되지 않은 수단에 의존하는 투쟁으로 변질되지 않으려면 전체 상황의 놀이적 성격이 절대적으로 보존되어야 한다. 스포츠적 경쟁이 강력한 내부 모순으로 인해 좌초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놀이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외적 조건들이 평등하고 놀이 참가자들이 평등한 기회를 부여받을 경우에만 참된 의미에서의 능력 비교가 가능하다. 도덕의 관점에서 볼 때 경쟁의 조건하에서 중요한 점은 출발 상황에서 평등을 보장해주는 일과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려는 참가자 개인의 마음가짐이다.

이상의 논의로부터 스포츠도덕의 두 번째 기준이 도출될 수 있다. 개별 규칙들의 준수만이 아니라 스포츠 자체의 보존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치열한 경쟁의 조건하에서 놀이로서 경쟁을 원하는 일은 이제 의무가 된다. 특히 투쟁적 요소가 개입되기 때문에 애초에 견지했던 놀이의 조건과 경계를 계속해서 존중하는 일이 중요하다. 즉, 이것은 ‘단지’ 놀이일 뿐이라는 생각을 계속해서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스포츠도덕의 정언명령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경기에서 당신에게 대항해서 겨루는 다른 이들을 기꺼이 따를 수 있는 그런 준칙에 따라 행위 하라!”

이 공식은 첫 번째 공식을 온전히 포함하고 있다. 이 공식의 장점은 극단적 형식의 스포츠에도 적합할 뿐만 아니라 스포츠를 그것의 전제와 목표까지 포함하여 고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단지 경쟁 중뿐만 아니라 그 이전과 이 이후에도 중요하다. 모든 스포츠에 구성적인 투쟁적 상황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위험에 대해 생각해보자. 투쟁에서는 언제나 인격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즉, 경쟁에서는 놀이의 상대가 필연적으로 경쟁자가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놀이하는 자’가 놀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놀이에서 승리하기를 바란다면 모든 ‘놀이하는 자’는 다른 ‘놀이하는 자’를 대적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 만일 내가 상대편을 공격하고 그를 능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은 투쟁에서 결코 모순되는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놀이의 논리에 속하기 때문에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은 도덕적인 행동이다.

스포츠적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거나 도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상대를 그럴싸하게 속여서 진짜 겨루는 것처럼 여기게 하는 자는 도덕적인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놀이에서도 의무라는 것이 존재한다. 열과 성을 다해 경쟁에 최선을 다하는 일, 그리하여 누가 더 우월한지를 보여주는 일이 이와 같은 의무에 속한다.

이와 같은 스포츠적 경쟁에 본질적인 힘들의 대립을 인본주의적 신념에 근거하여 완화시키거나 약화시키려고 시도하는 자는 스포츠에 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인간에 관해서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자라는 점이다. 문제가 생겨난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투쟁에서는 언제나 특별한 종류의 도덕적인  즉, 스포츠 상황에서 필연적인 경쟁심, 즉 라이벌 의식이 적대감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생겨난다. 그러나 경쟁심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적대감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이 요청 역시 놀이의 기능에 부합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요청은 무엇보다 ‘놀이하는 자’와 놀이를 보호해주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선수들이 적대감에 사로잡힐 경우에 그들은 놀이에 필수적인 미적 거리, 즉 생사를 건 실존투쟁에 대한 미적 거리를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선수들은 ‘놀이하는 자’로서의 자기이해를 지불하게 된다. 나아가 이들은 놀이에 참가하기 전에 했던 약속을 깰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배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놀이에서의 역할거리를 포기함으로써 실제로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기 전에 스스로 자신의 인격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놀이의 상황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놀이의 상황에서 이미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 자에게 일상생활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강조해야 할 것이 있다. 적대감의 금기화, 그리고 이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타자의 인정, 즉 타자를 동일한 법칙 하에서 참가한 인격으로 인정하는 일은 경쟁으로서 놀이의 논리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우리가 스포츠의 고유성을 보호하고 유지할 때에만 우리는 도덕적 요청에 부응하게 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놀이와 경쟁의 기능은 그것으로 인해 스포츠 자체가 존속하거나 파산할 수 있는 도덕적 원칙들의 기준을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다. 참된 스포츠가 존재하는 곳에 이와 같은 원칙들도 존재해야 하며,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더 이상 스포츠도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공정성, 상대편과 상대 선수의 존중, 경쟁상대에 대한 공손한 태도를 내용으로 하는 스포츠맨십은 그 자체로 이미 도덕의 범주라고 할 수 있다.

 

보편적 도덕규범으로서의 스포츠맨십

 

스포츠는 근본적으로 도덕적 행위와 무관하다. 스포츠선수는 도덕을 위해 스포츠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다. 스포츠 활동의 근본 목적은 승리의 획득에 있으며, 이는 대로 도덕과 대립적으로 보이기조차 한다. 상대방의 승리를 도와주는 배려와 친절은 경쟁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포츠 활동은 오직 경쟁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 자체의 도덕적 가치를 묻는다. 스포츠맨십은 경쟁이 갖는 잠재적 부도덕성을 일반적인 도덕적 덕목에 의해 제어하여 스포츠의 긍정적 가치를 유지하려는 도덕적 기재이다. 스포츠는 본질적으로 상대에 비해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활동인 까닭에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본능 및 감정에 휩싸이기 쉽다. 스포츠맨십은 경쟁의 이런 부정적인 요소를 일반적인 도덕규범을 통해 억제한다. 그래서 스포츠맨십은 경쟁 이전의 마음가짐으로 승리에 집착하지 않고 경기 자체를 즐길 것을 주문하고, 경쟁의 과정에서는 악의 없는 순수한 경쟁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 규칙의 준수, 페어플레이, 심판의 권위에 대한 복종 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경쟁 이후의 마음가짐으로 결과에 대한 겸허한 수용, 패자에 대한 배려, 승자에 대한 아낌없는 박수를 권장한다.

스포츠맨십은 스포츠 활동이 단순히 규칙에 의거한 경쟁이라는 형식을 뛰어넘어 인간 사이의 도덕감정을 자극하고, 이를 통해 도덕적 행위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해 나가는 일련의 정신적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스포츠맨십은 매우 구체적인 실천 덕목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우정(friendship)이라고 말할 경우 실체를 보여주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계 속에서 실천적으로 드러남, 이성의 작용보다 감성에 의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스포츠맨십은 대상화시켜 정의하기 어려우나 스포츠 활동에 있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실천이며 감성에 의해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정신의 영역이다. 이를 통해 스포츠의 다양한 가치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아놀드(P. J. Anord)가 스포츠맨십을 스포츠 자체를 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그런 종류의 칭찬받을 만한 일로 정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참조 : 스포츠맨십 1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