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명의 운동선수들이 서로 손을 맞잡으며 스포츠맨십을 발휘하는 모습

스포츠맨십 2편

스포츠맨십이란?

 

이번 글은 스포츠맨십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며 총 3편중 2편이다. 스포츠맨십은 스포츠가 폭력적 투쟁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내부적 감시기제이며, 스포츠 도덕의 다른 표현이다. 도덕의 근본 문제는 어떤 행위를 선택해야 할지 갈등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정체를 인식하고 합당한 행위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유지해나가는 일과 관련이 있다. 스포츠는 일차적으로 놀이이고, 놀이 중에서도 투쟁적 성격의 놀이, 즉 경쟁이다. 스포츠맨십은 놀이 상황과 경쟁 생황에서 스포츠맨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행위규범이다.

 

놀이의 도덕: 규칙의 존중

 

스포츠는 일이나 생존투쟁 같은 일상적 활동과 구별되는 활동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일상적 활동들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

먼저 언급될 수 있는 것은 스포츠가 일종의 놀이라는 사실이다. 스포츠는 일차적으로 놀이이다. 따라서 우리는 스포츠에 참가할 때 그 어떤 실존적 부담도 느끼지 않는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스포츠에 참가하여 놀이적 기분을 만끽하면서 그것을 즐길 뿐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소 무거운 마음과 진지한 태도로 스포츠에 임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중요한 시합을 앞둔 상황에서 훈련에 참가할 때나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경기에 임할 때 참가자들은 적지 않은 심적 부담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 스포츠는 반드시 해야 하는 필연적 활동은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인간의 실존적 필연으로부터 해방된 활동이기 때문에 여전히 놀이적 기분을 유지할 수 있고, 유지해야 한다.

스포츠는 놀이로서 반드시 해야 하는 필연적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 자체가 목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근대올림픽경기의 창시자 쿠베르탱은 스포츠 대제전인 올림픽 경기와 관련하여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했다.

이 활동에서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일, 즉 생존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사용하고 남은 자신의 힘들을 소진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일이다. 우리는 스포츠에서 자신의 고유한 힘과 능력을 마음껏 과시하고 발휘하면서 즐거움을 느낀다. 스포츠가 일이나 생존투쟁활동이 아니라는 점은 그 어원에서 잘 나타나 있다. 영어의 sport란 말은 19세기 영국에서 산업(industry)과 함께 등장한 단어인데, 이것은 ‘일에서 떠나서 놀다(to leave of work, hence to play)’라는 의미의 중세 프랑스어 desporter에서 유래하였다.

어떤 이는 스포츠가 노력, 땀, 투쟁, 열정 같은 개념들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놀이로 부르기를 주저한다.

특히 치열하게 승부를 다투는 경쟁스포츠에서 기록과 성과를 높이기 위해 선수와 지도자의 역할이 분리되고, 이에 따라 스포츠의 전문화가 가속되면서 사람들은 스포츠를 놀이로 부르기를 꺼려하고 있다. 이미 호이징아(Huizinga)는 20세기 중반에 스포츠가 프로화로 인해 스포츠가 아닌 것으로 타락했다고 썼고, 딤(Diem)도 프로스포츠는 스포츠가 아니라고 말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스포츠는 그 어떤 물질적 보상도 받지 않는 아마추어스포츠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놀이의 이해에는 쉽게 해명이 가능한 오해가 숨겨져 있다.

무목적성은 놀이의 내적인 전제일 뿐 놀이 참가자가 견지해야 할 마음가짐의 특성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무목적성을 놀이 참가자의 마음가짐과 결부시키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놀이는 스스로를 놀이로 규정해주는 규칙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놀이는 철저하게 규칙의 범위 내에서, 즉 규칙이 정하는 시간적·공간적·행동적 범위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일 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놀이규칙이 그 어떤 상위의 목적에도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직 놀이 자체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놀이의 의미도 철저하게 놀이의 실행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규칙은 놀이의 존재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목적 이외의 그 어떤 목적에도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놀이의 자기목적성과 무목적성이 의미하는 바이다.

놀이 참가자들은 놀이에 다양한 외적 목적을 결부시킬 수 있다. 우리는 일로부터 해방감으로 맛보기 위해 놀이에 참가할 수도 있으며, 건강이나 친교를 위해 놀이에 참가할 수도 있다.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놀이에 참가할 수도 있고, 자신의 성격을 활달하게 만들기 위해 참가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목적은 참가자들의 의도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놀이 참가자가 돈을 벌기 위해 놀이에 참가해도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놀이의 관점에서 볼 때 돈을 벌기 위해 참가하든, 건강을 위해 참가하든,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참가하든 큰 차이가 없다. 참가자의 동기야 어떻든 놀이규칙이 준수되는 한 놀이는 여전히 놀이인 것이다. 동기가 너무 강렬해서 놀이규칙이 무시되는 경우에 발생한다.

문제는 놀이 참가자의 외적 동기가 너무 강렬해서 놀이규칙이 무시되는 경우에 발생한다.

예컨대 승리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왔거나 큰 금전적 보상을 기대하거나 극도로 고조된 심리적 긴장 상태에 처해 있을 경우에 놀이 참가자들은 너무나도 쉽게 놀이규칙을 위반할 수 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처럼 정치적 이해관계나 경제적 이권관계가 놀이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을 경우에 그 놀이는 자체의 논리와 원칙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정치나 경제가 원칙적으로 놀이와 모순되는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해 및 이권관계의 개임으로 인해 놀이의 고유성에 대한 존중심이 너무 쉽게 약화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수의 놀이 참가자는 놀이의 결과가 큰 경제적 이득이나 높은 위신과 관련되었을 때 자기 모순 따위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이렇게 놀이에서 외적 동기가 우세해질 경우에 놀이 참가자는 더 이상 놀이적인 기분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고, 그가 하는 활동은 더 이상 놀이가 아닌 활동이 되며, 그 결과 ‘놀이하는 자’ 자신도 더 이상 ‘놀이하는 자’가 아니게 된다. 한마디로 ‘놀이하는 자’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스포츠에서는 이럴 경우에 대비해서 외적 통제 장치를 마련해놓고 있다. 물질적 이득이나 위신에 대한 기대 심리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에 상응하여 놀이규칙이 준수될 수 있도록 외적 통제도 더욱 강화된다.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경찰과 법이 이와 같은 통제의 업무를 담당하지만, 스포츠 상황에서는 주로 심판이 이 일을 담당한다. 여기서 외적 통제의 목적은 단 한 가지이다. 그것은 놀이가 놀이 아닌 것이 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 다르게 표현하면 놀이에서 규칙이 철저하게 준수되도록 보장해주는 일이다. 이것이 보장되어야만 스포츠 상황에서 ‘형식적 공정’이 유지될 수 있다.

외적 통제는 규칙을 자발적으로 준수하고자 하는 ‘놀이하는 자’의 ‘의지’를 전제한다. 만일 ‘놀이하는 자가 자발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면 통제로 불필요하다. 여기서 필요한 일은 ‘놀이하는 자’를 로봇이나 컴퓨터처럼 놀이 전에 프로그램하고, 놀이가 끝난 후 다른 프로그램으로 재설정하는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경우는 발생하지 않는다. ‘놀이하는 자’는 놀이 시작 전에 지도자로부터 여러 가지 지시를 받기도 하고, 놀이 중에도 작전과 관련된 각종 명령을 하달 받기도 하지만, 결국 놀이에 참여하고 놀이를 운영해나가는 것은 철저하게 ‘놀이하는 자’ 자신이다. ‘놀이하는 자’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 원해서 놀이에 참가하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 획득한 안목과 능력에 의지하여 놀이를 자발적으로 이끌어나간다. 이와 같은 사실의 확인은 우리를 도덕적 논의의 차원으로 이끌어간다. 도덕의 문제는 우리가 참가하는 놀이에서의 자발적인 행동에 대한 물음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이에서의 자발적 행동과 관련된 모든 문제가 도덕적인 문제는 아니다. 경기 중에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기술과 전략에 대한 결정은 비록 자발적 행동에 속하지만 도덕의 문제에 속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내가 축구경기에 참가할 때 봉이 달린 축구화를 착용하는 일이나 공격수의 역할과 골키퍼의 역할을 구별하는 일, 또는 오프사이드 규칙을 이해하는 일이나 슈팅 기회를 포착하는 일은 모두 자발적인 능력을 전제하지만 그 자체로는 아직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승부욕에 사로잡혀 허용되지 않은 축구화를 착용했을 경우나 주심으로부터 파울 판정을 받은 후 공을 밀쳐낸 것은 내 손이 아니라 상대편 골키퍼의 손이라고 우기는 경우 또는 내가 오프사이드 반칙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거나 내가 찬 공이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고 주장하는 순간이 모든 것은 도덕적인 문제가 된다. 한마디로 우리의 구체적인 행동이 개별 놀이규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의심받을 경우에 충분히 상상 가능한 갈등적 상황과 함께 도덕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이럴 경우에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를 어떤 인간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

즉, 내가 나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하기만을 원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지 아니면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승리만을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지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어떻게 해서든 승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될지 참된 의미에서의 승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놀이하는 자’의 도덕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놀이하는 자’가 자발적으로 참된 의미에서의 ‘놀이하는 자’로 남아 있기를 원하는 곳에 존재한다.

이상에서 분명해진 것은 도덕적인 물음이 적절한 상황 개념뿐만 아니라 모순 없는 자아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놀이를 하면서 기술적·전략적 결정을 내리는 경우에는 상황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도덕적 상황에서는 상황이 그렇게 분명하지가 않다. 예컨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대개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 유리한지 아니면 위반하는 것이 유리한지 마음속으로 갈등한다. ㉠ 이럴 경우에 내가 나 자신을 참된 의미에서의 ‘놀이하는 자’로 이해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문제가 해결된다.

‘놀이하는 자’의 역할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놀이에 참여함에 있어서 놀이규칙을 자발적으로 준수한다는 말과 같다. 다시 말해서 만일 내가 이렇게 해야 할지 저렇게 해야 할지 갈등하는 상황에서 그 어떤 타자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자발적으로 ‘놀이하는 자’의 역할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그에 합당하게 행동한다면 나는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스포츠의 도덕은 자발적으로 규칙을 준수하고자 하는 나의 의지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스포츠에서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말은 진심으로 규칙에 부합해서 경기에 임하기를 원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렇듯 도덕적 행위는 행위자의 참된 의지를 전제한다. 어떤 것은 그것이 실제로 원하는 것일 때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다. 우리가 모든 ‘놀이하는 자’들이 갖추고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하고 모든 ‘놀이하는 자’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의지이다.

놀이로서 스포츠도덕을 칸트의 정언명령 방식으로 표현하면, “그것이 놀이에 참가하는 모든 이들의 행동준칙일 뿐만 아니라 당신 역시 그것에 따르기를 원하는 그런 준칙(Maxime)에 따라 행위 하시오!”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을 좀 더 일상적인 문장으로 바꾸면 “규칙을 준수하라!” 또는 “규정된 규칙을 자발적으로 준수하라!”이다.

 

참조 :  스포츠맨십 3편